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와 덴노/생애 (문단 편집) === [[사쿠라다몬 의거]] === 나이 30살이었던 [[1932년]]에 조선인 [[이봉창]]에게 폭탄으로 살해 시도를 당했다.[* 참고로 이봉창 의사는 의거 이전에도 히로히토와 연관이 있었다. 조선인 대신 일본인처럼 살고 싶었던 이봉창 의사가 전향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히로히토 즉위식을 보러 교토에 갔다가 한글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일주일 동안 구금된 것이었다.] 하지만 폭탄 2개 중 하나는 잘못 던져져 말과 마부(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고, 하나는 불발이 되어 실패. 폭탄 투척 이후 [[일본제국 경찰|일경]]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 의사가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의사 바로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했으나[* [[이봉창]] 의사는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일본 헌병 장교의 명함을 도용했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은 것.] 이에 죄책감을 느낀 이봉창 의사는 스스로 자수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후 난바 다이스케와 마찬가지로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격렬하게 비난하는 어조'로나마 의거를 전할 수 있었으며[* 당시에는 총독부의 검열 때문에 신문 기사가 검열을 못 통과하면 내보낼 수가 없었다. 이런 검열 제도는 해방 후에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시절에도 [[보도지침]]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서 언론들은 정부의 입맛에 맞게 보도를 해야 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신문 독자들은 신문을 액면 그대로 읽지 않고 속뜻을 추론하면서 행간을 파악하는 식으로 읽었다.], 특히 [[중화민국]] 언론에서는 대놓고 "아쉽게도 불발되었다"는 기사로 보도했다.[*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의 황제를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맞지 않았다'''(韓人李奉昌 狙擊日皇 不幸不中/한인이봉창 저격일황 불행부중)." 이 기사를 본 일본 측은 격노했고, 결과적으로 이 보도는 [[1차 상하이 사변]]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